설렘, 새로운 것을 만들다

느껴보지 못한 설렘, 새로운 것을 만들다

도화원에서 성석진 작가는 캔버스를 제공한다. 세 명의 화가가 노닐 수 있는 공간이다. 도예가가 자신의 도자기를 캔버스로 쓰라고 내주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다(대학에서 성 작가와 함께 도자기를 공부했지만, 내가 그의 작품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면 그는 공방의 문을 굳게 닫아걸지도 모른다). 세 명의 작가는 물론 그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다. 자존심 센 예술가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이종격투가 벌어질지 알 수 없지만, 인상적인 작품들이 연이어 태어나고 있다.

맏언니격인 송인옥 화가는 평면에 추상화를 그리지만, 도자기에는 자연의 서정을 묘사하려고 한다. 흙의 성질이 자신이 오랫동안 그려왔던 소재마저 바꿔놓은 것이다. 화가는 추상으로 구현하던 보편적인 감성보다 자연이 일으키는 작은 감정의 동요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흔들림>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넉넉한 그릇 속에 가득한 붓 터치는 나뭇잎을 통해 자연의 생기를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그 생기가 가마가 열리기를 바라며 갖는 설렘에서 나왔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시간을 들여 흙을 굽는 행위를 몰랐다면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마음의 흔들림일 것이다. 이는 송 작가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초벌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서 구워내는 시간을 기다릴 때는 늘 설레고 걱정스러워요. 그래서일까요? 간혹 성 작가님이 애써 만든 도자기를 망쳤다는 자괴감도 들지만 ‘내 도자기가 이렇게 화사하게 변할지 몰랐다’는 그의 격려에 아이처럼 기뻐한답니다.”

도화원의 또 다른 멤버인 이정은 작가는 평범한 일상을 ‘이정은 월드’로 만든다. 그 세계는 잔잔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독특함으로 채워져 있다. 그 친밀한 독특함이 도자기와 만났다. <제각각>이란 작품에는 도심의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일이 가득하다. 딸기, 체리, 석류, 사과 등등, 작가의 말대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도자기 위라 생동감은 더하다. 나와 다른 개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살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이 경계를 허무는 콜라보레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자존심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강력한 힘이지만, 그것을 다독여 타자를 품었을 때, 또 얼마나 다양한 세계를 만들어내는지 성 작가의 도자기 화폭에 그려낸 이정은 작가의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다. 주위의 사물들이 들려주는 이음(異音)을 세상과 이어보고 싶다는 작가의 의지는 도화원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김현지 작가는 동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도자기에 그다지 관심은 없었다. 새로운 미디어 분야에 관심이 많아 학교에서는 디자인과목을 가르쳤고 논리적인 사고에 치우쳐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도자기는 자신에게서 잊혀지던 동양화의 감성을 다시 살려낸 소중한 매개이다. 계기는 어느 날 본 예원 학생들의 전시회였다. 학생들의 작품에 반해 그들을 가르치던 성석진 작가에게 도자기를 배우고 도화원 모임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 <안빈낙도> 시리즈에는 현대인의 이상적인 자화상이 담겼다.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예술을 하고 싶어 하는 작가 자신의 바람이기도 하다. 캔버스를 벗어나 머그컵을 떠다니는 ‘집배’는 그 자유를 얼마나 가까이서 만끽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 같다. 갤러리의 벽면에 걸린 그림이 아니라 일상에서 만지는 찻잔의 표면에서도 우리는 김현지 작가의 예술적인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